백인천 한국 스포츠 해외 수출의 원조
요즘의 한국 프로야구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WBC World Baseball Classic에서의 선전은 한국 야구가 더 이상 변방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줬다. 그러나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초기만 해도 한국 프로야구의 수준은 많이 낮았었다. 선수들의 마인드도 아마추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기술적 수준도 실업야구 시절을 넘어서지 못했다. 1991년에 시작한 일본 프로 야구와의 교류전이었던 한일 슈퍼게임에서의 참패는 톱클래스와의 현격한 수준차를 느끼게 해줬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 야구계를 주름잡았던 선수들은 소위 해외파였다. 4할 타자 백인천과 30승 투수 장명부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건너왔고, 22연승의 박철순은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왔다. 외국물을 먹고 온 선수들이 초창기 한국 프로야구판을 주름 잡았던 것이다. 이런 해외파 열풍의 중심에 백인천이 있었다.
백인천이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원년 시즌에 기록했던 4할1푼2리의 타율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대기록이다. 아마 앞으로도 이 기록을 넘어설 타자는 나오지 않을 듯 싶다. 미국 프로야구에서도 1941년 테드 윌리엄스 이후 4할 타자가 나오지 않고 있고,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지금껏 4할대의 타율을 기록한 선수가 단 한 명도 없다. 한국에서는 안타제조기 장효조, 야구천재 이종범이 4할 타율에 도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리그의 수준이 요즘처럼 높지 않은 시절이라도 4할대의 타율은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백인천은 MBC 청룡의 감독 겸 선수였다. 감독을 하면서 4할을 넘긴 것이다. 만화와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그의 나이는 운동선수로서는 환갑을 넘었다고 볼 수 있는 40살이었다. 그는 20살, 약관의 나이에 한국을 떠나, 불혹의 나이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4할 타자 백인천, 그는 한국 스포츠 최초의 해외 진출 선수였다. 백인천은 이미 고교 시절부터 날리던 선수였다. 서울의 공립 명문이지만, 야구에서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경동고, 경동고 야구의 유일한 전성기는 백인천이 재학 중이었던 1959~1960년이었다. 당시 전국 규모의 고교야구 대회는 동아일보 주최의 황금사자기와 조선일보 주최의 청룡기 단 두 개뿐이었다. 경동고는 1959년 황금사자기, 1960년에는 청룡기와 황금사자기를 모두 휩쓸었다. 후에 삼미, 롯데 등에서 코치를 역임했던 이재환, 프로야구 심판으로 활동했던 오춘삼 등도 당시에는 현역으로 뛰고 있었지만, 당시 경동 야구의 중심은 백인천이었다.
1959년 백인천은 고교생으로는 처음으로 서울운동장에서 홈런을 날렸다. 요즘보다 반발력이 훨씬 떨어지는 야구공과 나무 방망이로 경기를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성인야구에서도 홈런은 연례행사이던 시절이었다. 또래의 고교 선수와는 수준이 달랐던 것이다. 그 증거로 백인천 졸업 이후 경동 야구가 전국 대회 결승에 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백인천은 경동고 졸업 이후 농업은행 현 농협에 입단한다. 요즘에도 농협은 좋은 직장이지만, 변변한 기업이 없었던 60년대 초 농업은행은 최고의 직장이었다. 그의 운명이 바뀐 것은 1961년에 열렸던 아시아야구 선수권 대회였다. 당시 한국의 에이스 투수는 좌완 김성근이었다. 백인천은 포수로 김성근과 배터리를 이뤘다. 대만에서 열렸던 그 대회에서 한국은 일본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준우승에 그쳤다. 그렇지만 갓 고교를 졸업한 백인천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 백인천은 그 대회 유일한 홈런 타자였기 때문이다. 대회 직후 백인천은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어스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는다.
지금은 운동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박지성, 박찬호, 이승엽 등과 같은 레전드들이 해외에 자리를 잡고 있고, 주니어급인 기성용, 손흥민 등도 외국의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 이들의 선배로는 70년대 여자 테니스의 이덕희, 남자 탁구 박이희, 축구의 차범근 등이 있다. 많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스포츠에서 수출 1호 상품은 백인천이다. 1962년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던 백인천은 한국 스포츠 사상 최초의 해외 진출자였다.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백인천의 일본 진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백인천의 뜻이 워낙 강했다.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이승만 정권 시절이었다면 일본 진출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5·16 직후 군사정권 하에서는 가능했다. 어쩌면 당시의 집권자들은 이미 한일 수교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백인천은 일본 야구 진출 이후에도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일본 진출 초창기에는 도에이 팀에서 백인천을 외국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백인천이 일제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일본인으로 봐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제국주의적 해석을 팀에서 내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백인천이 일본인 행세를 한다는 비난도 많았다. 귀국길의 입국 카드를 일본 히라가나로 작성했다는 점이 구설수에 올랐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병역 미필로 인해 한국정부로부터 소환령을 받기도 해서 1971년 초 한국에 와서 4개월의 신병훈련을 마치고 일본으로 복귀한다. 1979년 독일 진출 이후 병역을 마치고 다시 독일로 돌아간 차범근과 비슷한 경우였다. 분단국가에서의 병역 의무와 관련한 고민은 60년대의 청춘이나, 2000년대의 청춘이나 매한가지이다. 그래도 한국 스포츠 수출 상품 백인천은 나라로부터 특혜를 받았다. 기초 훈련을 마치고 난 후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무관 자격으로 군 복무를 마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진출한 일본이었지만 백인천은 당당히 실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백인천은 1975년 일본 프로야구 타격상을 받아 일본 프로야구의 타이틀 홀더가 된 것이다. 이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이름을 날렸던 이승엽, 임창용, 선동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다. 물론 타격왕 장훈이 있지만, 장훈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정신과 기백은 한국인이지만, 장훈의 야구 기술은 메이드인 재팬이라고 봐야 한다.
백인천, 한국 스포츠의 해외 수출 1호였던 그는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별이 됐다. 고향을 떠나는 일은 늘 고독한 일이다. 나라 밖으로 나가는 일이 지금보다는 훨씬 어려웠던 60년대에는 더욱 더 그랬을 것이다. 까까머리 청년은 불혹의 나이에 한국으로 돌아와 4할대 타율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그는 시작도 훌륭했고, 선수생활의 마지막도 훌륭했던 위대한 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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