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1960년대 통증과 함성 속에 고유명사가 된 김일
프로레슬링 선수 김일은 고유명사다. 그를 떠올리면 변변찮은 스포츠 중계가 없던 60~70년대 서민들의 체육관 안, TV속 함성이 연결된다. ‘땡땡땡’으로 경기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와 ‘원, 투, 쓰리’로 이어지는 경기 캐스터의 숨 가쁜 경기 중계도 귓가에 맴돈다.
프로레슬링은 김일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전설적인 재일동포 레슬러인 역도산의 후계자라는 타이틀을 안고 1965년 귀국했던 그는 이내 역도산을 자신의 스승으로 바꿔놓았다. 그의 뒤를 이은 후배 레슬러 이왕표는 김일의 수제자라는 이미지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의 은퇴 경기와 은퇴식은 수차례 열렸다. 그가 20~30대에 주로 활동했던 일본에서의 은퇴식도 있었고 국내에서도 90년대 후반까지 그의 이름을 앞세운 여러 경기가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문화체육관도 본래 김일체육관으로 불렸고 레슬러들은 김일 문하생이 아니면 명함도 내놓기 어려웠다.
그가 자연인 김일이 아닌 고유명사의 단계로 올라가기까지에는 숱한 고난과 현대사의 양지와 음지가 담겨 있다. 1929년 전라남도 고흥 섬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후반부터 고향 씨름판을 주름잡았다. 소년 장사로 잘나가던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현대사의 비극인 여수·순천사건 시절 부역자로 몰리며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사형 집행 대상에서 빠지기도 했다. 6.25 전쟁 직후인 1950년 국민보도연맹 사건에서도 죽을 고비를 맞았지만 천우신조로 빠져나왔다. 실의에 빠진 그는 결혼해 농사꾼으로 고향에 머물다 어느날 일본 잡지에 실린 역도산의 기사를 보았다. 여수항 선원들이 역도산은 한국인이라고 일러주자 김일은 운명처럼 밀항을 해서라도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한다. 1956년의 일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서 불법체류 밀항자라는 이유로 또 다시 옥에 갇힌다. 그는 감옥에서 역도산에게 구원의 편지를 썼는데 주소를 몰라 ‘동경 역도산’ 앞으로 보냈다. 그 편지가 역도산에게 배달될 정도로 일본에서 역도산의 명성이 높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그는 역도산의 신원보증으로 겨우 풀려나 그 인연으로 역도산의 체육관에 문하생으로 입문하게 된다. 말이 문하생이었지 그는 역도산의 보디가드로 주로 활동한다. 매도 많이 맞았다. 하지만 그의 성실함에 탄복해서인지 역도산도 김일을 받아들였다. 역도산은 자신의 가라테 처럼 필살기가 있어야 한다며 김일에게 박치기를 익힐 것을 권했다. 함경도 출신인 역도산이 평양 박치기를 떠올린 탓도 있었다.
박치기 수련에는 왕도가 없다. 머리를 계속 박는 것 외에는 나무에 박고, 벽에 박는 것은 기본이었고 때로는 재떨이로, 골프채로, 일본도까지동원됐다. 김일의 전성기 시절 사진을 보면 황소를 상대로 박치기 시험 하는 것도 있을 정도다. 기절하기도 여러 차례였다. 하지만 피범벅속에서도 박치기 왕이 된 것은 분명했고 서서히 일본과 세계 레슬링계를 평정하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 등의 순회 경기를 통해 김일은 세계챔피언 벨트를 둘렀다. 하지만 1963년 그의 스승 역도산이 나이트클럽에서 야쿠자의 칼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밀항 10년 만인 1965년 그는 귀국을 택했다. 1965년 7월 그의 귀국을 보도하는 신문을 보면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그의 특기 박치기 이야기는 빠져 있고 완벽한 테크닉이 주무기로 묘사돼 있다. 김일과 함께 일본식 이름 오기 긴따로라는 링명이 함께 언급됐고 역도산의 후계자라는 말도 빠지지 않았다. 아직 고유명사 김일이 되기 전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김일 이전에 천규덕, 장영철 같은 국내파 프로레슬러들이 득세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경기를 펼칠수록 상황은 달라져갔다. 그의 박치기에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올라갔고 장충체육관은 관중들로 미어터졌다. 그의 경기 중계가 있는 날에는 TV가 있는 다방과 만화방은 늘 북새통이었고 마을에 TV가 몇 대 없던 시절이라 TV가 있던 이장댁 마당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위기도 있었다. 김일의 독주가 이어지자 장영철 등 국내파 선수들과 갈등이 빚어졌고 1965년엔 경기장에서 선수들간의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초 장영철은 자신에게 져주기로 했던 일본 선수들이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며 지게 됐다. 그러자 장영철의 문하생들이 일본 레슬러를 구타했고 스승을 겨우 구출했다. 겨우 몸을 추스린 장영철은 도리어 경기 뒤 김일에게 도전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경기장 폭행 때문에 경찰 조사를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장영철 쪽에서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털어놓은 사실이 알려지며 화제가 됐다.
1970년대까지 김일의 경기는 국민적 스포츠였고 그의 팬을 자처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김일체육관을 지어주기도 했다. 김일 가족들도 레슬링에 뛰어들었다. 그의 막내 동생인 김광식도 레슬러가 됐고 거구의 레슬러 남해산에게는 딸을 시집보냈다. 명실공히 김일의 시대였다.
하지만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야구, 농구 등 각종 스포츠로 볼 것이 많아지고 약물로 근육을 빵빵하게 키운 WWF 등 미국 프로레슬링의 시대에 단색 경기복만을 입은 배 나온 아저씨들의 아날로그식 프로레슬링은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고백은 여전히 레슬러들의 발목을 잡았다.
온 국민을 기쁘게 해줬던 박치기와 코브라 트위스트, 보디슬램 같은 레슬링 기술들이 그에게 남긴 상처도 컸다. 그의 스승 역도산은 연습이나 경기 도중 아무리 크게 다쳐도 김일을 병원에 가지 못하게 했다. ‘아프다고 엄살을 떨면 강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경기에서 박치기를 한 뒤 숙소에 돌아와서는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들린 날도 숱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하지만 병원에 가질 못했다. ‘전 국민이 박치기에 통쾌해하는데 박치기 왕이 병원에 가다니’라는 고민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진통제로 버텼고 더운물로 찜질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결국 그것이 모두 속병이 됐다. 은퇴 후 그는 ‘가장 하기 싫은 것이 박치기’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돈도 많이 벌었지만 사업 실패도 이어졌다. 링 위에서는 박치기 왕이었지만 사회에서는 물정 모르는 어설픈 사업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고유명사 김일도 병든 노인이 된 것이다. 일본에서 병을 치료하던 그는 1994년 다시 귀국해 10여 년간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2000년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은 이후 그는 건강이 호전돼 후배 양성과 프로레슬링 재건사업 등에 의욕을 보이기도 했지만 끝내 병마를 이길 수 없었다.
김일은 말년에 왕년의 라이벌이었던 병석의 장영철을 만나고 관중석에서긴 하지만 고별경기에 참여하는 등 생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였고 2006년 10월 26일 향년 77세로 별세했다. 화끈한 박치기의 추억을 남기고 반칙이 특기인 일본 선수들을 박치기와 코브라 트위스트, 풍차돌리기 등으로 혼내주던 김일의 모습에서 국민들은 쾌감을 넘어선 승리감마저 느꼈다. 그가 떠난 날 환호와 추억은 사라졌다.
프로레슬링의 한 페이지이자 한 세기도 끝이 났다.
참조: 마라톤의 승자 마라토너 이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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