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의 승자 마라토너 이창훈

마라톤의 승자 마라토너 이창훈

1940~1960년대 인생과 역사, 마라톤의 승자 마라토너 이창훈

사람들은 곧잘 인생은 마라톤 같다고 한다. 출발선에 섰을 때는 조바심이 나지만 출발 신호가 울리면 반사적으로 경쟁자들과 함께 뛰어나간다. 경기 초반에 때론 오버 페이스로 앞서나가기도 하지만 이내 뒤쳐져 걷고 만다. 때로는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고갯길을 넘어야 할 때도 있다.

마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완주다. 순위도 중요하지만 완주라는 성취에는 보이지 않는 노력과 땀이 배어 있다.

지금은 희미해진 이름, 그러나 한때는 육상계, 아니 대한민국 체육계를 뒤흔들었던 이름인 마라토너 이창훈의 인생에는 마라톤 같은 고난과 극복, 그리고 영광이 배어 있다. 그는 5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까지 20여 년간 국내 마라톤에서 우뚝 선 인물이었다. 1956년 멜버른올림픽에서는 4위에 입상했고 1958년 도쿄아시안게임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다. 이창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그 뒤 1982년 김양곤이 인도 뉴델리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딸 때까지 전인미답의 경지처럼 보였다. 물론 메달권은 아니지만 그가 올린 올림픽에서의 호성적도 1992년 황영조가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할 때까지 최고의 성적이었다.

이창훈은 1956년에 고등학생으로 올림픽에 참가했고 1960년에는 대학생으로 다시 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1958년 도쿄아시안게임의 마라톤 우승은 그에게 특별했다. 기록은 2시간 32분 55초로 부진했지만 멸시와 적대감 속에서 살던 재일동포들의 가슴을 뜨겁게 적셔놓았던 것이다.

1958년 마라톤 출전 선수의 선발 과정은 지금으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들다. 당초 그는 1958년 아시안게임에 1만m 코스에 출전하기로 돼 있었다. 그는 당시 군인이었던 관계로 연습을 제대로 못해 마라톤 선수 선발전 출전을 포기했지만 이미 선발돼 있던 3명이 일본의 신문사가 주최한 마라톤 대회에서 모두 기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육상협회는 ‘전 국민이 사랑하는 마라톤이 노메달로 전락할 것을 우려해 멜버른 올림픽에서 선전했던 이창훈을 대타로 선발했다. 이같은 혼란은 1960년 로마올림픽 대표 선발 과정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다른 점이라면 1958년 선수 선발은 스스로 포기한 성격이 짙다면 1960년은 주변 상황이 그의 발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50년대 말~60년대 초의 혼란스런 상황은 그가 달리게만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사회 변혁을 꿈꾸는 것처럼 이창훈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은 혁명의 해였다. 자유당 독재에 신물이 난 국민들은 이승만 하야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갔고 시위행렬의 맨 앞은 학생들 차지였다. 중앙대생이었던 이창훈도 그 대열에 합류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고교생이던 김주열 열사의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르고 경무대 앞에서 학생들을 향해 총알이 발사됐던 시절에 피끓는 20대이던 그도 그 현장에 동참했던 것이다. 하야한 대통령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하고 부통령 이기붕은 가족들과 자살을 택하는 등 혁명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친구들이 죽어나가고 총상을 입은 이들이 병상에서 시름할 때 이창훈 역시 깊은 고뇌에 빠졌다.

체력 조절과 마인드 컨트롤이 필수적인 마라톤 경기에서 시위 현장 한가운데서 총성을 듣고 친구들이, 형제들이 쓰러져가는 것을 보며 충격을 받았을 그의 역주는 애당초 부적합했는지 모른다. 어쩔 수 없이 그는 1960년 5월 19일에 열린 로마올림픽 파견 마라톤 예선에 불참한다. 하지만 이창훈 없는 마라톤 대표팀은 에이스가 빠진 약체 야구팀이나 진배없었다. 당시 머리가 복잡하고 몸도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 그는 선수 선발전 1만m에 출전했지만 6위에 그쳤고 마라톤에는 출전도 못 했다. 육상 단체와 체육회는 고육지책을 내놨다. 이미 선발된 선수들의 기록이 이창훈의 종전 기록에 미치지 못하자 추후 이창훈을 추가로 선발하기 위한 안전판을 내놓은 것이다. 육상연맹은 이창훈을 포함 우수선수 네 명이 경쟁하는 절차를 거쳐 한 명을 추가하겠다고 했지만 이창훈의 동문인 중앙대생 20여 명은 연맹 앞에서 시위를 해 경쟁이 아닌 낙점을 통한 그의 선발을 압박했다. 학생들의 힘을 보여준 4.19의 뒤끝이었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경쟁이 아닌 우선순위 낙점을 주장한 것은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정의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아무튼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결국 이창훈을 포함해 네 명이 그해 9월 로마올림픽에 나서게 된다. 현지에 도착한 마라톤 대표 네 명 중 컨디션이 좋은 세 명이 경기에 나서는 편법이 동원됐다. 이창훈은 어렵사리 경기에 나섰지만 입상에는 실패했다.

당시 1위는 에티오피아의 맨발의 마라토너 비킬라 아베베였고 이창훈은 국내 선수 중에서는 가장 앞섰지만 20위에 그치고 말았다. 당시 아베베는 2차 대전 중에 이탈리아의 침공을 받았던 에티오피아의 군인 출신 선수였다. 군인인 그가 전쟁이 아닌 스포츠 경기이긴 했지만 자신들을 침략했던 국가의 수도 한복판을 멋지게 가로지른 것이다. 마치 이창훈이 1958년 도쿄아시안게임에서 식민지 조선을 약탈했던 침략자들의 수도와 황궁 주변을 기세 좋게 내달렸던 것처럼 말이다.

1958년의 이창훈과 1960년의 아베베의 상황은 비슷했다. 하지만 1960년의 아베베와 이창훈은 달랐다. 이창훈의 기록은 2시간 25분대였지만 아베베의 기록은 2시간 15분대였다. 10분이나 차이가 났던 것이다.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는 훈련에 집중해야 할 운동선수들에게도 가외 부담을 강요했다. 이창훈은 그 뒤 “마라톤 승부의 30퍼센트는 정신력이 판가름한다고 생각한다”고 당시를 술회하기도 했다.

마라톤은 인간 이창훈의 인생을 바꿔놓기도 했다. 그는 1958년 도쿄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한 뒤 1936년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했던 손기정의 사위가 됐다. 손기정은 사위를 통해 마라톤 중흥의 꿈을 이뤄보고자 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마라톤에 뜻을 두었던 이창훈은 1965년 선수 생활을 접었다. 은퇴한 뒤에는 소속팀이던 한국전력에서 선수들을 지도했다. 1978년 한전 육상팀 감독에서 일반직으로 옮기면서도 육상연맹 등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그는 평생 마라토너였다.

이창훈은 마라톤 코스에서는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에서도 페이스를 조절하며 스스로를 시험했다. 하지만 대학생과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역할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1958년 일본 도쿄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게 했던 스포츠 선수 이창훈이나 1960년 4.19의 한복판에서 분노를 쏟아냈던 대학생 이창훈은 똑같은 사람이다.

그 시절 사람들은 그에게 빚진 것이 너무 많다.

 

참조: 백인천 일본 프로야구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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