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의 시작, 해방 후부터 60년대까지
나라를 되찾으면, 간절한 소원을 이루면 신천지가 열릴 것 같았다. 식민지 국민의 설움으로 원치 않게 일장기를 달 수밖에 없었던 스포츠 선수들은 1945년 해방 뒤 그토록 원하던 태극기를 달 수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은 외형상 대한민국으로 국명만 바뀌었지 여전히 약소국인데다 정부도 없는 신생국가 신세였다.
처음 대한민국 선수로 올림픽 무대에서 태극기를 게양시킨 주인공은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역도의 김성집이었다. 정부 수립 이틀 전인 1948년 8월 13일이었다. 며칠 뒤 복싱에서 또 다른 선수, 한수안이 동메달을 땄지만 ‘1호 메달 = 김성집’은 흔들림 없는 진실이다. 당시 28세의 휘문고 체육교사였던 김성집은 올림픽 시상식에서 태극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회고했다.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처음 참가해 첫 메달을 얻은 감격과 런던에 도착하기까지의 고생스러웠던 일정에 대한 서러움도 작용했으리라.
당시 60여 명의 런던올림픽 출전 선수와 임원진은 일본, 중국, 홍콩, 인도, 이탈리아, 네덜란드, 영국 등으로 배와 열차를 갈아타며 무려 20여일의 원치 않는 여행을 해야만 했다. 수월치 않은 일정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지원도 당연히 좋을 리 없었다. 당시 선수단은 한여름인데도 단복으로 가져간 두꺼운 겨울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고 뱃멀미에 무더위에 허리까지 다친 그는 악전고투 끝에 동메달을 따냈다고 회고한다. 이같이 박한 대우에는 빠듯한 자금 사정도 작용했다. 당시 막 출범을 앞둔 정부에서는 올림픽 출전 자금을 해결하기 위해 올림픽 후원회를 만들었고 올림픽 후원권을 발행, 판매해 8만 달러를 겨우 조달했다.
김성집은 4년 후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도 또 한 번 동메달을 따내 대한민국 최초의 2회 연속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는 감격을 누렸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고, 전란의 비극 속에서도 한국이 헬싱키 올림픽 출전을 결정한 가운데 나온 메달 소식이었다. 그는 1954년 필리핀 마닐라아시안게임 때도 금빛 바벨을 번쩍 들어올렸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나이였다. 그가 첫 올림픽 메달을 땄을 때인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이상할 것이 없지만 그 당시 대한민국 국민 평균 수명은 46.8세였다. 남자로 따지면 40대 초반에 세상을 뜨는 일이 드물지 않았던 때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는 현재 나이로 환산해 40~50대에 첫 메달을 딴 셈이 된다. 게다가 32세에 참가한 헬싱키올림픽에서도 바벨을 들어 올려 동메달을 땄고 1956년 멜버른올림픽에선 36세의 많은 나이로 참가해 5위에 입상하는 노장 투혼을 발휘했다.
그는 현역 은퇴 후에는 대한체육회 이사와 사무총장을 거쳐 18년간 한국 엘리트 체육의 산실인 태릉선수촌 촌장을 맡아 태극전사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김성집은 2011년 9월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됐다. 해방 후 대한민국이 첫 출전한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인의 이름으로 첫 동메달을 따냈고 4년 뒤에 또다시 메달을 딴 공로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이후 영원한 현역의 체육인으로 체육 발전에 이바지한 업적도 평가받았다.
김성집보다 극적인 선수는 1년 앞서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한 서윤복이었다. 그는 세계 4대 마라톤 대회 중 하나로 1947년 4월 19일에 열린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대회 반세기 사상 동양인 최초로 우승했다. 기록도 당시로서는 세계 신기록인 2시간 25분 39초였다.
서윤복의 우승은 세계적인 빅뉴스가 됐고 현지 언론들은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대한민국의 건각’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됐지만 그 역시 런던의 김성집처럼 환경이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윤복은 일본인들이 입던 헌 옷을 구해 유니폼 삼아 입었고 마라톤 운동화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동대문 근방에서 헌 스파이크 슈즈를 구해 밑창의 못을 빼고 리어카 바퀴의 고무를 잘라 덧대 신는 것이 고작이었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 출전도 그가 서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의 옛 이름에서 연습하던 어느 날, 하버드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한국에 파견된 미군이 대회 정보를 알려주어 가능한 일이었다.
출국까지는 더 험난했다. 당시에는 외국으로 나가려면 5000달러 상당의 현지 교민의 재정보증 조건이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선수와 감독 일행의 미국행 서류작업을 돕던 군정청 직원이 600달러를 내놓고 군정장관인 하지 Hodge 중장에게 모금운동을 건의하면서 3000달러가 모아졌다. 나머지 2000달러는 세브란스의 언더우드Underwood 박사가 한국 돈과 달러를 교환해주어 마련했다. 힘들게 돈은 해결됐지만 비행기 편 마련은 더 힘들었다. 미군 군용기를 얻어 타고 미국 공군 공항을 경유해 보스턴에 도착한 것은 대회 개막 1주일 전이었다. 국내에서 마라톤 풀코스를 겨우 2번 완주한 경험밖에 없던 서윤복과 코치진은 경기 막판 3km 구간에서 전력질주를 한다는 작전을 실전에 옮겨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 소식을 접한 김구는 ‘족패천하(발로 천하를 제패하다)’라는 휘호를 써주었다.
오는 길이 험난했던 만큼 서윤복의 돌아가는 길 역시 수월치는 않아 또 다른 민족 지도자 이승만의 후원을 등에 업고서야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사실 신탁통치 문제 등으로 미국 군정청과 갈등하며 돌파구를 마련하려 미국에 머무르던 이승만은 4월 19일 현지에서 서윤복의 우승 소식을 들었다. 고국으로 돌아갈 마땅한 교통편도, 여비도 없던 서윤복은 이승만의 정치적 동지인 임영신 상공부 장관, 중앙대 총장 역임의 도움을 받았다. 임영신의 주선으로 서윤복 일행은 미국 전역을 순회하는 축하 퍼레이드를 했다. 대한민국을 아는 이는 없었지만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자의 나라라면 이야기는 또 달랐던 것이다. 또 국내에서는 마라톤 대회 우승이 이승만의 방미를 돋보이게 하는 장식물로 한껏 치장되어 정치선전에 이용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승만이 4월 21일 귀국해 서윤복의 우승을 국내에 널리 알렸음은 물론이다.
43일간 미국 체류를 마친 서윤복은 동남아시아와 일본을 거쳐 인천으로 들어오는 화물선을 얻어 타고 미국 출발 18일 만에 귀국했다. 6월 22일 인천항에서 열린 시민환영회에서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몇십년 동안 독립운동을 했는데도 신문에 많이 나오지 못했는데 너는 겨우 2시간 25분 39초를 뛰고 연일 신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구나.”
물론 이승만은 그의 우승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이용됐음은 알리지 않았을 터였다.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 등을 통해 독재의 길을 걷다 1960년 부정선거로 인해 또 다른 4.19에 직면했다.
자신만의 4.19로 이승만을 우뚝 세웠던 서윤복은 나중에 이런 말을 남겼다.
“먹는 것, 입는 것 다 좋아졌으니 운동선수가 운동만 생각했으면 좋겠다.”
굶주렸던 조선의 청년은 대한민국 태극기를 가슴에 달았지만 여전히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은 이를 악물고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거나 역기를 들어 올리는 역도에서, 혹은 죽을 힘을 다해 치고받는 권투에서 빼어난 성과를 냈다. 미는 뒷전이었고 힘이 앞섰다. 투박했지만 그들의 팔뚝은 불뚝거렸고 낡은 유니폼은 땀에 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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