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축구 대회를 만들다-박스컵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축구 대회를 만들다-박스컵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축구 대회를 만들다-박스컵

한국 축구는 오랫동안 아시아의 맹주로 불려왔다. 요즘은 특히 아시아의 맹주로 불릴 자격이 있다고 본다. 1986년 멕시코 대회 이후 10회 연속 월드컵에 진출한 아시아 유일의 국가이고, 2002년 한일월드컵 때는 기적의 4강 진출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 최고의 리그로 평가받는 영국 프리미어리그에도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많은 선수를 내보내고 있기도 하다.

아시아의 맹주라는 별칭은 지난 60~70년대에도 한국 축구를 일컫는 단어였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어떤 잣대로 보더라도 60~70년대 한국 축구가 아시아 최강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아시아 축구 정상권 국가라면 월드컵이나 올림픽쯤은 가끔씩이라도 진출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 축구는 이란, 호주 등에 번번이 발목을 잡히면서 월드컵에는 나가보지도 못했다. 올림픽 역시 일본과 말레이시아의 벽을 넘지 못하면서 지역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렇다고 역내 축구 최강국을 가리는 아시안컵을 제패했던 것도 아니었다. 한국은 홈그라운드에서 열렸던 1960년 아시안컵에서 우승한 이후 변변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축구는 아시아의 맹주로 불렸다.

이는 언론이 붙인 과장된 수사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의 많은 스포츠팬들이 한국 축구를 아시아 최강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이는 동남아시아에서 열렸던 축구 대회에서 한국 축구가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80년대 초까지 동남아시아에서 열렸던 축구 경기는 한국 스포츠팬들의 관심을 모으는 비중 있는 이벤트였고, 이런 대회들은 위성을 통해 안방으로 생생히 중계되기도 했다. 60~70년대는 위성 중계가 요즘처럼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컵, 태국의 킹스컵이 동남아시아의 메이저 대회였고, 태국의 퀸스컵, 인도네시아 대통령컵 등이 그보다 아래 수준의 대회였다. 그중 메르데카컵과 킹스컵에는 한국 축구 대표팀이 출전했다. 60~70년대 한국 축구 대표팀은 청룡, 화랑 등으로 불렸는데, 청룡과 화랑은 메르데카컵, 킹스컵에서 연일 승전보를 보내왔다. 대회 참가국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동남아시아 국가들이었지만, 당시는 이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도 국가적 경사가 되는 감격 시대였다. 우승컵을 안고 개선한 대표 선수들이 서울 시내에서 당당히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60년대의 보릿고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70년대, 한국도 국제축구대회 하나 정도는 가질 만했다. 특히 1970년 한국 축구 대표팀 청룡은 태국 킹스컵과 말레이시아 메르데카컵, 그리고 연말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축구 경기에서 우승하는 절정의 기량을 보여줬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1971년부터 시작된 대회가 박대통령컵 아시아 축구대회였다. 일반명사로서의 대통령컵이 아니라 고유명사 박대통령컵이었다. 그래서 이 대회는 박스컵 President Park’s cup으로 불리기도 했다. 자연인의 이름을 딴 스포츠 이벤트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건국 이후 한국의 두 번째 IOC 위원이었던 이상백 박사를 추모하는 이상백배 한일대학농구대회가 요즘도 열리고 있고, 한국전쟁 중 목숨을 잃은 이용문장군배 승마대회도 4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 두 대회는 사후 고인을 기리는 성격을 가진 대회였다. 살아 있는 당대 최고 권력자의 이름을 딴 스포츠 대회가 만들어졌다는 점은 당시 권위주의적 사회상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이름을 딴 스포츠 이벤트의 원조가 박스컵 축구는 아니었다. 이미 60년대부터 박정희장군배 동남아시아여자농구대회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 최대의 이벤트였던 박스컵

아무튼 한국 축구 최대의 이벤트였던 박스컵 대회는 1971년부터 시작됐다. 한국을 포함해 아시아 8개국이 자웅을 겨뤘던 이 대회에서 한국은 60~70년대 아시아 축구의 강자였던 버마와 공동우승을 차지했다. 첫 대회에서는 170만원을 들여 만들어진 순금 우승 트로피가 마련돼 장안의 화제가 됐다. 대한축구협회는 이 우승컵에 보험을 들어 관심을 끌기도 했다.

1975년까지 아시아 국가들을 초청해 대회를 치르던 박스컵은 1976년부터 탈아시아 대회를 선언하면서 구미권 팀을 참가시키기 시작했다. 브라질이나 미국의 클럽 팀들이 박스컵에 참여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은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구미권 팀들이 클럽의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 아니라 국가명으로 불렸다는 점이다. 브라질의 상파울로 선발팀이나 빅토리아 클럽 등은 모두 브라질로 불렸다. 유니폼도 브라질 축구 대표팀과 비슷한 노란색 상의를 입고 경기를 했다. 중계를 하던 캐스터도 브라질이라고 했지, 무슨 클럽이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한국팀은 브라질의 클럽팀에게 우승컵을 몇 차례 넘겼지만 별다른 문제는 아니었다. 세계 최강 브라질한테 진 건데, 문제가 될 게 무엇인가?

70년대에 열렸던 10번의 대회에서 한국팀은 여섯 차례 우승했다. 70년대 초에는 버마에게 우승을 두 번 빼앗겼고, 70년대 후반에는 브라질 클럽팀에게 우승컵을 넘겼지만 그래도 좋은 성적을 냈다. 여기에 간간히 메르데카컵과 킹스컵 우승이 양념처럼 더해졌다. 월드컵과 올림픽 예선에서는 번번이 고배를 마셨지만, 그래도 축구팬들에게 한국 축구는 아시아의 맹주였다.

 

대회명칭이 바뀌는 과정은 한국사회의 탈권위주의와 궤를 같이하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박스컵은 사라졌다. 대회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1980년부터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박스컵이 ‘전스컵’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대회 명칭에서 고유명사가 빠져버렸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인 1995년부터는 대통령배라는 이름도 빠져버렸다. 대회명은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로 바뀌었다. 코리아컵 축구대회는 1997년까지만 개최되고 막을 내렸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과 올림픽에 빠지지 않고 출전하면서 굳이 다른 축구 이벤트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최대의 축구 이벤트는 박스컵에서 출발해 코리아컵으로 막을 내렸다. 대회의 명칭이 바뀌는 과정은 한국사회의 탈 권위주의화와 궤를 같이하는 흐름이 아닐 수 없다.

 

참조 :  스포츠 저널리즘의 시작, 일간스포츠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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