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수, 국가 주도 경제의 스포츠 버전
복싱을 헝그리 스포츠라고 한다. 한국 복싱 사상 첫 번째 세계챔피언인 김기수는 전형적인 헝그리 복서였다. 그는 6·25 전쟁 통에 월남한 소위 38 따라지(삼팔선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을 이르는 말)였다. 그는 물장수로 유명한 함경남도 북청에서 남쪽으로 넘어온다. 아무 연고도 없는 반도의 남쪽 끝자락 여수, 구두닦이, 껌팔이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니 있었다. 복싱이 있었다. 여수의 극장 가설 링에서 펼쳐지던 복싱 경기를 보고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60~70년대 많은 복서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맨주먹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복싱에 뛰어들었다.
다른 사람보다 강한 주먹과 빠른 다리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복싱에 뛰어든 이후 연전연승이었다. 여수에서 이름을 얻어 당시의 복싱 명문 서울 성북고로 스카우트된다. 아시아에서는 그의 적수가 없었다. 스무살이던 1960년, 그에게 기회가 왔다. 로마올림픽이 열린 것이다. 당시 한국은 스포츠 후진국이었지만 복싱은 달랐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한수안이 동메달을 땄고, 1956년 멜버른올림픽에서는 송순천은 은메달을 땄다. 로마올림픽을 앞둔 김기수의 성적은 흠 없는 87전 87승. 그야말로 동방불패였다.
로마올림픽에서 그는 생애 첫 패배를 맛본다. 그에게 패배를 안겨준 선수는 홈링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 유럽 최강자였던 벤베누티와 맞붙은 김기수는 3회에서 한 차례 다운을 당한 끝에 판정패를 당했다. 일방적인 패배였다. 지금도 이탈리아의 복싱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벤베누티는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으리라, 김기수와 벤베누티가 6년 후 프로 세계에서 다시 조우할지를 아시아에서도 변방에 속했던 코리아에서 펼쳐진 첫 번째 세계 타이틀 매치에서 다시 글러브를 맞댈지를.
김기수는 로마에서 돌아온 직후 프로복서로 전향한다. 다음 도쿄올림픽까지 4년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프로로 전향한 이후에도 김기수는 어려운 길을 걸었다. 프로는 돈을 받고 링에 오른다. 프로복서라는 상품을 소비할 수 있는 시장이 있어야 정상적인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1인당 GNP가 68달러에 불과했던 극빈국 한국에서는 프로복싱이 성행할 수 없었다. 최소한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돼야 프로스포츠가 자리를 잡을 수 있는데, 당시 우리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김기수는 결국 일본 진출을 선택한다. 그런 이유로 프로 데뷔 초창기 커리어의 상당 부분은 일본에서 기록됐다. 일본에서도 김기수는 일본 복서들을 꺾고 승승장구한다. 그런 김기수를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역도산이었다. 거구의 서양 레슬러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여 격파함으로써 2차 대전 패전 이후 실의에 잠겨 있던 일본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던 일본인들의 영웅.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던 역도산이었지만, 그래도 핏줄에는 끌림이 있었는지 김기수에게 자신의 체육관에서 훈련할 것을 제의한다. 역도산의 배려 덕에 김기수는 역도산의 체육관에서 수련하면서 한국 복싱사상 최초로 동양 타이틀을 차지한다. 세계챔피언도 아닌 동양 챔피언이었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사건이었고 김기수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다.
역도산이 도쿄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칼을 맞고 생을 마감하자, 김기수는 귀국을 결심한다. 동양 챔프 김기수는 일본으로 떠날 때보다 훨씬 거물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온다.
1960년대는 국가 주도의 총력 경제 건설이 행해지던 때였다. 무엇이든 관이 주도하는 시대였다. 김기수를 위해서도 국가의 지원이 이루어졌다. 아직 포항제철이 생기기 전이었던 1965년, 박태준은 대한중석사장으로 있었는데 귀국한 김기수를 위해 신설동에 권일 체육관을 지어준다. 김기수의 전용 체육관이었던 셈이다. 또한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차지철도 김기수의 후원자로 나섰다.
김기수는 이런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계속 승리를 거두다 드디어 세계 타이틀에 도전할 기회를 잡게 되는데 그 상대는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 바로 로마올림픽에서 그에게 유일한 패배를 안겨줬던 사내였다. 김기수는 벤베누티를 홈링인 서울로 부른다. 벤베누티가 받을 개런티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5만5000달러였다. 문제는 국민영웅을 위해 세계 타이틀전을 홈링에서 치르기로 했는데, 이 돈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의 연간 수출이 3억 달러도 안 되던 시절에 5만5000달러는 생각하기 힘든 거액이었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외국의 세계챔피언들을 불러들여 경기를 했다 한국 복서가 졸전이라도 펼치면 외화 낭비라는 비난을 받았을 정도였으니, 60년대에는 어떠했을까?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기획원 장관에게 외화를 융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라는 지시를 내려 세계 타이틀전이 열렸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한편 김기수의 대전료는 500만원. 당시로서는 거액이었지만 패배할 경우 개런티를 받지 않는다는 옵션이 달려 있었다.
1966년 6월 25일. 비가 오는 일요일 밤의 장충체육관. 15라운드까지 김기수와 벤베누티는 일진일퇴의 접전을 벌였다. 결과는 2대1로 김기수의 판정승. 둘 중 누구의 손을 들어줘도 이상하지 않은 접전이었지만, 홈링의 이점이 작용했다. 이로써 5만 5000달러를 들여 세계 타이틀전을 유치한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벤베누티는 경기 패배 후에도 며칠 동안 더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대전료의 정산이 제대로 안 됐기 때문이었다.
김기수는 세계챔피언이 된 이후에 영화를 찍기도 했는데, 당대의 여배우 김지미와 함께 주연으로 출연한 <내 주먹을 사라>가 그것이었다. 박노식도 출연한 이 영화의 감독은 60년대의 명감독 김기덕이었다.
은퇴 이후에도 김기수는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무엇보다도 다른 은퇴 복서들과는 달리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소유하고 있던 명동의 ‘챔피언 다방’은 70년대의 부동산 투기 붐과 맞물리면서 그를 부자로 만들어줬다.
모두가 가난해서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주어진 기회를 잘 잡았다. 나라로부터 받은 빚도 어느 정도 갚았다. 김기수는 3차 방어전에서 5만 5000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이탈리아 원정 경기에서 산드로 마징기에게는 패배했지만, 거액의 개런티는 받아냈던 것이다.
김기수의 세계챔피언 등극은 국가 주도 총력 개발 시대의 스포츠 버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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