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축구팀 양지를 아십니까?

실미도 축구팀 양지를 아십니까?

실미도 축구팀 양지를 아십니까?

1966년과 2002년, 36년의 간격을 두고 있어 별 관계도 없을 것 같은 이 두 해는 사실상 한 나라인 아시아의 두 국가에게는 환희의 해요, 유럽의 한 국가에게는 뼈아픈 해다. 아시아의 두 국가는 대한민국과 북한 그들 식으로 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고 유럽의 다른 나라는 이탈리아다. 이쯤 되면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듯도 싶다. 2002년 한일월드컵 16강전 한국이탈리아전에서 보았던 ‘Again 1966’이라는 구호 말이다.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에서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고 세계 축구 8강에 진출했을 때 세계가 경악했다. 외부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평균신장 165cm의 꼬마 팀이 철벽 수비진을 자랑하는 강력한 우승후보를 격파했던 것이다. 당시 북한은 박두익, 한봉진 등 걸출한 선수들이 활약했고, 단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이른바 ‘사다리 전법’을 구사했다. 선수들이 점프를 할 때 높이를 키우기 위해 같은 팀 선수들의 어깨를 짚거나 하는 식으로 사다리처럼 뛰어오르는 것이다. 16강에서는 이탈리아를 꺾었지만 북한은 포르투갈을 맞아 전반에 3골을 먼저 넣고도후반에서 포르투갈의 검은 표범 에우제비오에게 4골을 허용하며 3대 5로 져 4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석패했지만 이 같은 ‘북괴의 선전’은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스포츠 경쟁도 체제 대결로 여겼던 1960년대 당시 한반도 남쪽, 특히 정권 담당자들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북한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박정희 파시스트 체제의 보루였던 중앙정보부는 김형욱 부장의 주도 아래 사실상 국가대표 축구팀 ‘양지‘를 만들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의 적수가 되지 못했던 한국은 월드컵 지역예선 출전을 포기한 상태였다. 영국 런던 현지에 요원들을 보내 북한 축구의 기량을 직접 확인한 중앙정보부는 곧바로 이회택 등이 주축이 된 축구팀 ‘양지‘를 결성했다. 팀 명칭인 ‘양지’는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앙정보부의 부훈에서 따온 것이었다.”

양지는 김형욱의 전폭적 지원 아래 유럽으로 전지훈련을 떠나기도 했다. 마카오에서 수입한 양복천으로 옷을 해 입었다는 의미의 마카오 신사(런던이나 파리가 아닌 마카오라는 말도 조금은 촌스럽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해외 출국이 드물던 시절에 유럽 전지훈련은 다른 종목 선수나 기업들에게도 쉽지 않았다. 물론 전지훈련 말고도 힘겨운 스파르타식 훈련도 기다리고 있었다. 북파공작원을 실미도에서 훈련시켰듯이 양지 팀은 서울 이문동 중앙정보부 내에서 합숙하며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축구의 실미도 부대를 연상하면 크게 틀리지 않았다.

양지 팀의 주장을 맡은 이는 허정무 국가 대표팀 감독의 삼촌인 허윤정이었다. 좋은 대우와 빼어난 선수들 때문이었는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중앙정보부의 위세 때문이었는지 양지는 창단 직후부터 좋은 성적을 거뒀다. 1967년 아시아컵 쟁탈 한국대표 선발전에서 대한중석 팀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또 그해 메르데카컵에서도 공동우승을 차지하는 데 양지 팀 소속 선수들이 주역을 담당했다. 선수들은 양지에서 뛰면 군복무를 대신할 수도 있었다. 정보부는 양지 팀을 명실공히 국가 대표팀으로 만들기 위해 1969년부터는 국내 대회에 참가시키지 않고 해외훈련에 집중토록 했다. 그 해 5월 태국의 국제군인축구대회 극동지역 예선을 거쳐 그리스의 본대회 준결승에서 알제리에게 석패한 양지는 그 길로 서독,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인도 등을 돌며 친선경기를 펼치고 105일 만에 귀국했다.

1세대 스트라이커인 이회택은 양지 시절을 회고하며 “당시 월급으로 2만원을 줬는데, 국영기업체 중간 간부 월급 정도로 큰돈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1967년 메르데카컵 공동우승을 이끌며 아시아 최우수선수 MVP로 뽑히기도 했다. 이밖에 당시 양지 팀에선 공격수 이회택과 수비수 김호, 김정남 외에 김기복, 김삼락, 박이천과 이세연, 이영근, 정병탁, 김호엽, 정규풍, 오인복, 서윤찬 등이 주전으로 뛰었다. 김정남, 이회택, 김호는 20여 년이 지난 뒤 각각 1986년 멕시코월드컵,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감독을 맡기도 했다. 선수 시절 밟지 못했던 월드컵 무대를 지도자로서 이끈 것이다.

하지만 양지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양지를 비춘 해가 음지로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심양면 후원자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물러나면서 양지 팀도 1970년 3월에 사라진 것이다. 대통령 3선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김형욱은 박정희로부터 버림받았고 결국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나면서 양지도 곧 해체되었던 것이다. 양지를 대신한 것은 청룡, 백호였고 이 역시도 북괴 타도가 주된 목적이었다. 1970년 1월 취임한 장덕진 신임 대한축구협회장은 ‘북괴 타도’를 외치며 국가상비군 청룡, 백호를 구성했다. 그 해 3월 3년 1개월 만에 양지는 결국 해체됐다.

김형욱의 운명도 양지처럼 파란만장했다. 김형욱 전 부장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지만 여권에서도 워낙 적이 많아 보복에 대한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그는 결국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 의회 청문회를 통해 유신 정권과 박정희의 치부를 고발하기도 했다. 그 뒤 행방불명됐고 사실상 그가 키운 중앙정보부에 의해 살해됐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양지의 창단 목적은 달성됐을까? 월드컵에서의 선전이 목적이었다면 4강에 진출한 2002년에야 이뤄진 셈이고 출전이 목적이었다면 1986년에 달성됐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은 이탈리아를 꺾으며 8강에 진출하고 그 뒤 8강전에서도 스페인에 승부차기로 승리해 4강에 진출했다. 1986년 한국은 이탈리아에 2대3으로 져 16강 진출에 실패했다(물론 마라도나가 이끌던 해당 대회 우승국인 아르헨티나에는 1대3으로 졌다).

이탈리아는 36년의 간격을 두고 한 번은 남한에게 또 한 번은 북한에게 치욕의 패배를 당했다. 2002년 당시 이탈리아는 승부가 아닌 심판의 편파(?) 판정에 의해 졌다고 굳게 믿고 있다고 한다. ”

 

참조 :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축구 대회를 만들다-박스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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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축구팀 양지를 아십니까?”에 대한 3개의 응답

  1. dioguebub 아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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